본문 바로가기
Thinking

심연을 응시하는 자와 다리를 놓는 자

by leopard4 2025. 10. 12.

등대지기, 지도 제작자, 시계 장로, 소리 수집가 모두 '자신이 구축한 완벽한 세계의 한계를 깨닫고, 그 너머의 진리(미지, 비어있음, 자연의 시간, 침묵) 앞에서 겸손해지는' 동일한 구조를 따르고 있었죠.


그렇다면 이번에는 그 전제 자체를 뒤집어 보겠습니다. '겸손과 침묵이 언제나 미덕인가?' 라는 질문에서 출발하는, 완전히 다른 결의 이야기입니다.

 

제목: 심연을 응시하는 자와 다리를 놓는 자

깊은 협곡을 사이에 둔 두 개의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 협곡은 너무나 깊어 바닥이 보이지 않았고, 그 안에서는 기묘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한쪽 마을에는 **'심연을 응시하는 자들'**이 살았습니다. 그들은 대대로 협곡의 가장자리에 앉아 그 깊이를 사색했습니다. 그들은 "심연의 깊이를 안다고 말하는 것은 가장 큰 교만"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협곡의 바람 소리에서 수만 가지 의미를 읽어냈고, 그 거대함 앞에서 인간의 왜소함을 깨닫는 것이 최고의 지혜라 여겼습니다. 그들은 협곡을 건너려는 어떠한 시도도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오만한 짓'이라며 비판했고, 그들의 침묵과 관조는 성스러운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쪽 마을에서 한 명의 **'다리를 놓는 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녀는 심연의 신비함이나 바람 소리의 의미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녀에게 협곡은 그저 '건너가야 할 장애물'일 뿐이었습니다.

 

그녀는 밧줄을 던져 거리를 재고, 암석의 강도를 망치로 두드려 확인했습니다. 심연을 응시하는 자들은 그녀를 보며 혀를 찼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어찌 무한을 자와 망치로 재려 하는가. 그대의 지식은 심연의 털끝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다."

 

다리를 놓는 자는 그들의 말을 들으며 대답했습니다. "나는 심연을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오. 그저 건너가려는 것이지. 당신들이 심연의 위대함에 대해 천 편의 시를 쓰는 동안, 내 아이는 강 건너 약초를 구하지 못해 앓고 있소."

 

그녀는 일했습니다. 그녀의 지식은 불완전했고, 그녀의 계산은 여러 번 틀렸습니다. 때로는 바위가 무너져 내렸고, 밧줄이 끊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심연을 응시하는 자들은 "보라, 저것이 교만의 끝이다"라고 속삭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알지 못함에 대한 앎'이 옳았다고 확신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 다리를 놓는 자는 마침내 투박하고 불안해 보이는 나무 다리를 완성했습니다. 심미적이지도, 완벽하지도 않았습니다.

 

심연을 응시하는 자들 중 가장 현명한 노인이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그대는 결국 다리를 놓았지만, 여전히 심연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다리를 놓는 자는 땀을 닦으며 다리 저편을 가리켰습니다. 그곳에서는 그녀의 아이와 다른 마을 사람들이 약초와 음식을 들고 손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대답했습니다.

 

"맞습니다. 나는 여전히 심연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 내 아이는 더 이상 아프지 않습니다."

 

그날 이후, 심연을 응시하는 자들은 여전히 협곡의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의 지혜는 더 깊어졌고, 그들의 겸손은 더 완벽해졌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고 사람들의 삶은, 심연의 깊이를 아는 자가 아니라 그 위로 기꺼이 불안전한 다리를 놓았던 한 사람에 의해 바뀌었습니다.

 

이것은 완벽한 겸손이 때로는 가장 정교한 형태의 무기력일 수 있다는 이야기이며, 세상을 바꾸는 것은 앎의 깊이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려는 의지'**일 수 있다는 변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