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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nking

늙은 지도 제작자와 빈 양피지

by leopard4 2025. 10. 12.

'지식의 축적과 그 본질'

제목: 늙은 지도 제작자와 빈 양피지

세상 끝자락의 도시에, 모든 길과 강, 모든 산맥과 계곡을 양피지 위에 옮겼다고 자부하는 늙은 지도 제작자가 살았습니다.

그의 작업실 벽에는 그가 평생에 걸쳐 그린 지도들이 걸려 있었고, 도시 사람들은 그 지도들을 절대적으로 신뢰했습니다. 그에게 있어 그의 지도는 곧 세상이었고, 세상은 그의 지도 안에 있었습니다.

 

그는 종종 창밖을 보며 미지의 땅에 대한 허황된 이야기를 나누는 여행자들을 경멸했습니다.

"세상에 더 이상 새로운 길은 없다."

그는 확신에 차 중얼거렸습니다. 그에게 '모른다'는 것은 단지 아직 기록되지 않은 불편함일 뿐, 정복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그의 자부심은 세상의 모든 빈틈을 자신의 잉크로 채워 넣는 데서 나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먼지 쌓인 작업실 문을 열고 때 묻지 않은 눈을 한 젊은이가 들어왔습니다.

젊은이는 벽에 걸린 완벽한 지도들을 잠시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더니, 노인에게 뜻밖의 것을 청했습니다.

 

"선생님의 지도 중 하나를 사러 온 것이 아닙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가지신 것 중 세상에서 가장 좋은 '빈 양피지'를 구하고 싶습니다."

 

노인은 어이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필생의 업적인 '선'과 '기호'가 아니라,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빈 종이를 달라니. 그는 젊은이의 무지를 꾸짖으려 입을 열었지만, 젊은이의 고요한 눈빛에 순간 말을 잃었습니다.

 

노인은 마지못해 작업실 가장 깊은 곳, 가장 아껴두었던 비단처럼 부드러운 양피지 한 장을 꺼내 먼지를 털었습니다. 그리고 그 텅 빈 순백의 표면을 마주한 순간, 그는 숨을 멈췄습니다.

 

자신이 그어놓은 수만 개의 선들, 빼곡히 적어 넣은 지명들. 그것들은 세상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가두고 있었습니다. 강은 정해진 길로만 흘렀고, 산은 정해진 높이로만 솟아 있었습니다. 그의 지도 위에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시작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눈앞에 놓인 이 텅 빈 양피지 위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강이 흐를 수 있고, 이름 없는 산이 솟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 텅 빈 공간이야말로 무한한 세계였습니다. 그의 완벽한 지도들은 과거의 기록, 즉 '죽은 앎'이었지만, 이 빈 양피지는 미래의 가능성, '살아있는 시작'이었습니다.

 

그는 평생 동안 자신이 앎을 쌓아 올린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가능성을 지워나가는 과정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노인은 젊은이에게 돈을 받지 않고 양피지를 건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 그는 제자들에게 지도를 그리는 기술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진정한 지도는 세상의 모든 것을 그려 넣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 알려주기 위해, 기꺼이 비워둘 용기를 아는 것이다."

 

이것은 종이 위 선들에 대한 이야기이자, 그 선을 긋는 손에 대한 조용한 경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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