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태어난 아이가 자신의 삶을 알 수 있을까 ?
전생과 현생 그리고 후생 혹은 차원과 설계나 계획, 운명과 결정, 자유 같은것들에 대해
아마 그것은 직관적으로써는 모르는 일이지만
인식적으로써는 이해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성장하며 인식의 한계와 범위를 확장 시키지 않던가
그런데 그것은 어차피 정해져있는 그릇이다.
흔히 생각을 뇌의 크기 보다도 시냅스의 연결 밀집도 같은것으로 이야기 하던데
그런것이 유한하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유한속에서 인간은 최선의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으며
그 선택은 다분히 종의 보존 혹은 DNA 보존적이다.
그러나 이기와 이타 사이에 균형을 맞추는 설계나 계획은 꽤나 어렵다
이타는 전체를 생각하는 마음 이기는 부분을 생각하는 마음 (나를 생각하는 마음)
전체를 생각하는 이유는 부분인 나를 생각하기 때문이요
전체의 일부인 나를 생각하는것은 다시 전체를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 둘은 사실 같은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것을 구분짓는 이유는
이타와 이기의 상태값을 알기 위함
즉 0과1사이에 무수한 0.00000... 같은 순환 소수?가 존재하지만
그것이 0에 가까운지 1에 가까운지 가늠하기 위한 가늠자로써 사용하는것이다.
그래서 어떤 선택은 그러한 실수의 선택이다.
종의 보존 ? 혹은 에너지의 혹은 질서의 보존으로써의 선택
그리고 그 선택은 인식의 범위 안에서 이루어진다.
아이일때 작은 그릇의 인식범위 안에서 선택하던 선택들은
성장하며 중간 그릇으로 큰 그릇으로 확장된다
이것은 과학적으로는 시냅스의 밀집도가 축소되는것보다 확장되는것이
평생에 걸쳐 증가하는 쪽으로 동작한다면
결국 선택은 성숙해 질 수 있다 라고 이야기 할 수도 있을것이다.
하나의 선택은 그러한 연결점들에 대한 해석의 결과이므로.
인간의 가장 숭고한 선택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미 종교나 역사속에서 엿 볼수 있다.
희생, 자비, 사랑 같은것들
그것이 대체로 존중받는 이유는
그것이 전체를 생각하는 마음에 부분인 자신을 버리는 태도이기 때문이고
자신을 버린다는것이 그 만큼 어렵다 라는것을 인간들은 의식하든 안하든
그것의 고통을 직감한다는것이다.
아마 자신이 그만큼 소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역지사지를 보는것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그러한 면에서 알 수 있듯
부분인 자신을 희생하는것은 전체를 사랑하는 마음이고
그것은 어렵다. 그리고 그게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대단히 존중받는 길임에도 극 소수만이 진정 그것을 행하기 때문일 것이다.
답인줄 알면서 행하기 어렵다는것은 실제로 아주 어렵다는것을 이야기하는것이다.
그러한곳에서 생겨나는 희소성은 진정한 희소성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아는만큼 보이며 보이는만큼 행할 수 있다 라고 이야기하고싶다.
그래서 전체를 보는것은 어렵다고 이야기하는것이다.
전체를 본다는 것은 무수한 연결을 헤아린다 라고 이야기하는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사물과 우주, 우주와 차원, 차원과 순환, 순환과 무한, 무한과 또 무한
하나와 분리 동시와 동시 그리고 그 동시와 동시의 동시...같은 헤아릴 수 없는 전체를 아우르는 전체의 무한한 동시와
같은 생각으로 담을 수 없는것들
그리고 그 담을 수 없는 진리를 담으려 하지않고 깨우쳐 주는 말들
그게 말하자면 축복의 통로라고 이야기 할까
아무튼 그래서 그게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 에너지 효율의 관점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래서 내가 말하는것은
다 큰 어른이라도 동일한 그릇은 아니라는것
그릇의 크기로 성장을 비교하자면 다 큰 어른도 아이같다고 할 수 있을것이다.
그래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것은
전체를 생각하는 마음, 진정한 사랑, 진정한 이타심 같은것들은
그러한 인식의 크기가 클수록 그런것들을 더 헤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것이다.
그러니까 인식의 크기는 결국 연결의 이해에서 나오며
그러니까 아이나 아이같은 사람은 결국 그러한 연결이 적으며 이해가 적으니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 이 아닐까 싶은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예수가
아버지께 이 잔을 피할수 있게 할 수 있다면 피하게 해달라고 하였던가 ?
그러니 축복의 통로? 일지라도 사실 모든 이해를 가지고 그런 이야기하는 하지 않을것이지만 말이다.
그러니 통로든 아이든 결국 다시 정해진 인식의 범위를 알려준다.
절대적 존중을 받는자가 그러할지인데
그것을 다른이에게 바라는것은 어찌보면 당연히 불가능한 기대일지 모른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0이 1이 될수 없다고 해서
내가 0.999...같은 무결함을 바라는것이
죄는 아니지 않은가?
선과 악을 판단짓는것도
결국엔 그러한 관점들이다.
그러니 헌법이니 질서니 규율이니 윤리니 하는것들도
사실은 그러한 하나의 관점 좌표에서 탄생한 것이며
그것이 실제로 0에 가까운지 1에 가까운지 완전 무결한지는
검증 할 수 없으므로 내가 그것들을 알량한 인식으로 규정짓지 말라 라고 이야기 하는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관점 일 뿐이고 나의 주관일 뿐이다.
인간은 선악을 구분짓지 않으며 살아 갈 수 없으며
자동적 선악 분별 시스템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내가 하고싶은말은 간결하게
아무리 자동적 선악 분별 시스템 이라고 하더라도 어른이라면
어른답게 어른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가라는 것이다.
이 말은 단순히 상황을 보는것이 아닌 배경을 보라는것이다.
다시 꺼내면 절대적 존중을 받는 통로들 조차도 무한한 배경을 읽지않고 그저 의탁했다.
그러니 내가 당신에게 그러한 수준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분명히 아이와 어른은 달라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어른을 정의하는 인간의 정의이지 않은가 ?
나는 그래서 말하는것이다.
참 어른도 아이같구나.
그렇다고 내가 그것의 선악을 말하는것은 아니다
나는 그저 절대적 존중에 대해 이야기하는것이다.
자신이 그토록 소중하다면 결국 전체의 일부이고 결국엔 전체의 순환인 당신이
유한과 무한과 동시의 모든것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역설적으로 자신이 소중하지 않다는것의 반증이되어
메아리처럼 돌아오는 자신의 심판의 칼날에 언젠가 베이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아무튼 이러한 관점에서도 나는 현실에 선악을 구분하며 하루를 살아가고
그러한 모순과 역설 그리고 당연함을 인정하며
당신의 아이같은 행동을 이해하면서도 눈물이 머금어지는
그러한 반복속에
지적인 유희이며 일기를 쓴다.
그래서 결국에 삶이란
그저 행하는것이며 그저 행하는것이란
그저 생각하지 않는것이다.
그것들은 현실에서 당신의 삶에서 당신의 인격에서 당신의 말에서 당신의 행동에서
당신의 모든것에서 보여진다.
나는 그러한 배경을 읽는 사람이며
나는 그래서 행하기를 주저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글은 내가 단순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나는 너무 어른같은 어른으로 자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역설적으로 나는 아이같은 어른이 되어야만
더 인간적인 삶을 영위 할 수 있지 않을까 ?
그래서 삶이란 참 말할 수 없는것이다...
이것이 내 삶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지않을까 ..?
'meditati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공하다는것은 알 수없다. (0) | 2026.03.06 |
|---|---|
| 진리란 없다. (0) | 2026.03.02 |
| 교회는 B2C 힐링 서비스?? 바보 학교의 설립에 대하여 (0) | 2026.02.28 |
| 톱니바퀴와 바다의 노래 (0) | 2026.02.28 |
| 진정한 자유란, 필연(결정론)에 대한 인식이다 (0) | 2026.02.28 |